역사/한국사

예송논쟁/ 조선에서 예론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

정암님 2018. 5. 3. 21:35


김장생과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산림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보편원리를 중시했다. 주자의 <가례>는 의리와 예법의 일반원칙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왕실도 적용대상이었다. 송시열은 장유라는 보편원칙앞에는 왕실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이부정을 끝까지 포기하지않았다. 그런데 보편예법을 왕실에 관철할 것인지 여부는 국왕의 위상과 연동된 민감한 문제였다.

 

송시열은 국왕의 권력도 보편원리인 의리에 부합할 때 정당성을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다. 의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국왕도 근본적으로 사대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국왕이 사대부를 대표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신하는 국왕에 대한 충성의 전제로 의리를 확인해야 했다. 이때 국왕과 신하의 관계는 의리로 맺어진다는 의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송시열의 논리에서는 결과적으로 국왕의 전제권이 축소되고 신하들의 자율성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김장생은 원종추숭에서 종통을 강조하고 송시열은 기해예송에서 효종의 체이부정을 언급했다. 얼핏보면 송시열은 종통을 경시해 김장생과 다른 결론을 내린듯하다. 하지만 명분의 절대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둘의 논리는 동일했다. 혈통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인조와 왕실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남인의 논리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윤휴와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산림은 생각이 달랐다. 의리와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도 송시열과 차이가 없었다. 허나 그들은 의리를 대변하는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했다. 유학에서는 가-사회-국가가 동일한 윤리성에 기초해서 움직인다.  인과 같은 개인의 덕성은 현실에서 효와 같은 실천윤리가 되고 국가차원에서는 군주에 대한 충이 된다. 이로써 군주는 의리의 체현자이자 신민에게는 아버지같은 위상으로 군림한다.  군주와 신하가 의제적 부자관계가 되면 신하의 충은 효의 절대성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이 된다.  따라서 윤휴는 모든 신민은 군주에 대한 동일한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허목은 종통을 이은 군주는 장유의 차례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군주의 특별한 위상을 강조하는 논리는 성리학 이전의 고대유학에 근접해 있었다.  허목의 스승 정구는 고례에 관심을 갖고 개인과 국가예법의 차이에 주목한 바 있었다. 허목등은 관심을 고대 유학으로 확장해 육경을 깊이 연구했다. 육경은 공자이전 고대중국의 문물과 예제를 주로 설명한 경전들이다. 그 사회에서는 사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대체적으로 국왕과 민 일반의 구도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사의 특별한 위상을 강조한 성리학과는 국가운영의 지향이 달랐다.


이처럼 예송은 겉으로는 상복을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속내는 국왕의 정통성 문제, 국가운영에서 국왕과 사대부의 자율성을 둘러싼 사상문제도 내포하고 있었다. 


요약 정리)

1. 17세기 대동의 길/ 문중양등 지음/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