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권에 의지하여 서울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시전 상인들은 점차 도전자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특히 한강연변에서 상장한 경강상인들은 서울 도성안의 중소상인, 외곽의 장시, 지방 상인들과 결탁해 18세기 후반에는 시전 상인을 밀어내고 마침내 서울의 상품 유통권을 장악했다.
경강상인들은 주로 배를 이용해 전국을 무대로 장사를 했다. 그들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여러 곳을 다녔기 때문에 물가의 변화와 차이를 신속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세차익을 이용해 많은 돈을 벌었다.
경강상인들은 국가의 세곡운송에도 참여했다. 그들은 세곡을 운송하고 운송비를 받는데 만족하지 않고, 관리와 결탁해 부정한 방법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대표적 방법이 투곡, 화수, 고패였다. 투곡은 관리와 짜고 세곡을 빼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항해 도중에 일부러 배를 난파시켰다(고패). 화수란 세곡을 싣고 가는 동안에 일부를 빼돌리고 이를 감추기 위해 쌀에 물을 부어 불리는 것이다.
이렇게 부를 축적한 경강상인들은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이는 난파 위험이 늘 도사리는 선상보다 좀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은 한강 연변에 영업장을 만들고 여객주인(객주)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이시기 선상들을 보면 선주나 물주는 자본력이 큰 상인이나 양반이었고 직접 선상활동에 나서는 사람은 신분이나 경제력이 낮은 자들이었다.
원래 한강 연안의 여객주인이란 시골에서 배를 타고 상품을 팔러오는 상인들의 물건을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대략 총 거래액의 10%)를 받거나 지방 상인인 향상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 댓가를 받아 생활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사이에 주종관계는 없었다. 즉 지방상인은 자기가 거처하고 물건을 맡길 여객주인을 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여객주인은 향상에 비해 그다지 유리한 위치는 아니었다. 여객주인은 창고를 만들어 향상이 싣고 온 물건을 임시로 보관해 주고, 시전상인들과의 거래를 주선했다.
그런데 서울로 반입되는 물량이 많아지고 객주들의 수가 증가하자 경쟁이 붙게되어 서울로 들어오는 향상들을 자신의 고정 고객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생겼다. 즉 특정지방 상인이 상품을 가지고 서울로 들어올 때는 반드시 특정 객주의 집에 물건을 맡기기로 계약하는 관계가 성립하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향상을 가리키는 여객과 그 주인이라는 관계가 성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객주와 향상간 관계가 고정되기 시작하면서 여객 주인권이 갖는 경제적 의미가 커졌다. 특히 물종별, 지역별 전관제가 성립하면서 그 의미는 더욱 커졌다. 여객주인(이하 객주로 표기)들은 처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과 계약을 맺다가 이어 특정 지역 세곡에 대한 독점, 즉 어느 지역 세곡은 반드시 자기 집에서 하역하도록 하는 관계를 맺었다. 나아가서는 특정 지역에서 생산한 물건을 싣고오는 상인이나, 서울로 들어오는 특정 물건은 반드시 자기에게 넘겨야 한다는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요즘에도 음식점이나 술집에 강진집이니 목포집이니 하는 지방도시 이름을 상호로 하는 사례를 종종 본다. 특히 강이나 바다 근처에 있는 도시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상호가 바로 여객주인의 자취다. 가령 조선후기에 목포집이라는 것은 목포에서 올라온 향상과 독점적으로 거래하는 객주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객주의 구성과 역할이 강화되면서, 그들은 시전상인과 서울의 상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원래 서울의 상품유통구조는 시전을 정점으로 했다. 즉 지방에서 물건을 싣고 온 선상이나 향상은 그것을 경강 연변에 있는 객주에게 넘긴다. 그러면 객주는 시전 상인을 불러 상품을 보여주고 거래를 주선했다. 이들 사이에 거래가 성립하면 시전상인은 물건을 자신의 점포로 가져가서 일반 소매상이나 소비자에게 전매했다. 즉 서울에 반입된 상품은 반드시 향상->객주->시전 상인->중간 도매업자->소비자의 단계를 거치며 유통됐다.
그런데 시전상인들은 자신들의 독점권(금난전권)을 남용하여 상품을 헐값에 사들이려고 했다. 객주는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독점권)이 미치지 않는 서울 주변에 달리 판매할 수 있는 유통구조가 없었으므로, 어쩔수 없이 그들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객주나 경강상인이 이윤을 확대하려면 시전 상인들을 유통 구조에서 배제시켜야 했다. 그것은 서울로 반입되는 상품을 반드시 시전에 넘겨야 하는 규정을 철폐시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철폐 노력이 곧 객주로 정착한 경강상인이 발전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경강상인이 시전을 배제하고 서울의 유통구조를 장악해 도고 상업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서울과 주변 장시의 성장이다. 서울로 물자 반입이 활성화되자, 전통 시장인 종루외에 염천교 부근의 칠패, 지금의 광장시장 부근인 이현에 새로운시장이 성장해 종로와 규모가 비슷해졌다. 또 서울 외곽에도 새로운 상품 유통의 거점들이 생겨났다. 경기 광주의 송파장과 양주의 누원장(의정부시 호원동 부근)장이다. 이 두지역은 시전상들의 금난전권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경강상인들은 상품을 서울로 가져가지 않고 누원과 송파장을 통해 동북지역과 삼남지방으로 유통시킬 수 있었다.
객주들은 또한 서울의 상품 유통에서 시전상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품은 전담 객주에게 전매됐다. 객주는 시전상 대신 성안에 있는 중간 도매업자나 서울 밖 송파, 누원 상인들을 불러 은밀히 물건을 유통시켰다. 중간 도매업자들은 이 물건과 시전에서 구입한 소량을 섞어 서울지역에 유통시켰다. 행상 역시 상품 공급권을 쥐고 있는 객주의 눈치를 살폈다. 객주들은 시전상들이 금난전권을 무기로 행패를 부린다거나 서울의 상품가격이 하락하면, 상품을 서울외곽지역으로 빼돌리거나 자신들이 직접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반출시켰다.
18세기에는 객주의 조직망과 함께 육상.해운 교통이 발달하고 전국적 유통망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경강상인은 이 유통망을 활용하여 전국적 상업망을 장악했다. 경강상인이 이렇게 성장하자 조정은 시전상들을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포기하고 경강상인들을 새로운 상업세력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1791년 단행된 신해통공이다.
요약 정리)
1. 18세기(왕의 귀환)/ 김백철등 지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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