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은 산림숙덕지사, 산림독서지사의 준말로 재야의 덕망과 학식이 높은 선비를 말한다. 산림은 비록 초야에 은거하고
있었지만 정국의 동향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때로는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의 옳고 그름을 예리하게 비판하기
도 했다. 그들의 뒤에는 강력한 문인기반이 존재했다. 따라서 산림은 한 개인이 아니라 특정 학파, 특정 붕당의 정신적
지주였다. 산림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열정승이 왕비 하나만 못하고 , 열 왕비가 산림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나
돌 정도였다.
재야의 학자에 불과한 산림이 왜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엇을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유교의 정치전통에 기인한다. 유교에서의 이상정치는 성인이자 군주인 성왕의 정치다. 예컨대 요
순시절에는 도덕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왕은 현실에서는 언제나 이상일 따름이다. 유학자들은 공자
이래로 성과 왕은 분리되었고 성왕의 도통은 공자 맹자 주자같은 성현이 계승했다고 생각했다.
분리된 성과 왕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손쉬운 길은 능력을 갖춘 국왕이 성왕을 표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지
속적으로 관철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은 국왕이 자신을 대리하는 재상을 잘 지목하는 것이엇다.
그러면 통치의 일정수준은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상은 결국 국왕의 보좌역에 불과한 데다 재상권이 커질수록
국왕의 견제 또한 커진다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방법은 공자의 도통을 계승한 학자가 국왕을 잘 계도해 분리된 성과 왕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맹
이 걸은 길이기도 했으니 이 사례가 유교에서는 전형이었다.그러나 조선의 국왕은 학자를 형식적으로 초빙한 사례가
많았고 그들을 스승의 예로 맞거나 제도화한 사례는 드물었다. 따라서 군주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큰 학자 산림이
나온다면 유림의 기대는 커지게 마련이었다.
16세기이래 사림 정치가 완숙해질수록 산림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다. 광해군 대에 정인홍은 조정에 올라간 일이 많
지 않았으나 유생, 관료의 지원를 받아 정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산림과 국왕, 관료, 유생의 관계 및 역활등
에 관한 기본 골격이 갖추어졌다. 인조반정후 서인세력은 숭용산림의 기치아래 산림을 수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반정세력이 산림을 예우하는 이유는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집권 기반을 한시라도 빨리
구축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623년 성균관에 설치된 사업(종4품)을 시작으로 세자시강원의 찬선(정3품), 익선, 자의등
이 설치되었다.1658년에는 성균관에 좨주(정3품)가 설치되었다. 산림직은 대부분 세자의 교육관련 직책이었으므로 산
림은 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따라서 세자가 훗날 국왕이 되면 산림은 그 국왕과 특별한 관계를 누릴 수 있었다.
산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를 거치지 않아야 했다. 도학이 존숭되는 사회에서 과장을 드나든 인사가 사표
가 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산림은 학덕을 겸비한 명사라야 했다.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결별한 채 강학과 수양에
매진해 대유의 학식과 통유의 기국이 있어야 했다. 이는 곧 산림의 본질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징소로 표현되는 조정의 초빙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소명이 내렸다고 곧바로 응해서도 안 되었다. 의례
적이나마 거듭 상소해 사직을 청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만약 이러한 절차를 어기면 이록을 탐하는 경박한 인물로 지
목되기 십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산림직에 임명되어야만 진정한 산림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이처럼 산림이 되기위한
조건은 까다롭고 절차는 복잡했다. 또한 사림의 공론에 부합하고 조야가 심복할 수 있는 인사를 선별하기란 쉽지 않
았다.
그러나 일단 산림이 되면 예우 또한 극진했다.
우선 산림에게는 관품에 구애받지 않고 등용, 승진시키는 특진이 부여되었다. 모든 것이 왕의 특지로 처리되었다.
이외에도 사관이 왕의 소명을 받들고 산림의 거처를 직접 방문하는 예도 있었다. 소명에 응한 경우 가마를 타거나 역
마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조정에 들어오면 유신으로 칭송되고 경연에 참석할 수 있엇다. 음식.의복.시
탄등 예물의 하사는 물론 병이 들면 어의가 와서 진찰하기도 했다.
그런데 산림에게는 금기사항이 있었다. 직책에 연연하여 오래 조정에 머무는 일이었다. 입조하기가 무섭게 사직하는
것이 행공의 원칙이었다. 그럴수록 관품은 올라가고 명망은 높아졌다. 불과 수개월만에 판서를 거쳐 정승의 반열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산림의 출처관은 난진이퇴(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쉽게 여기는 행위)였다.
인조반정이후 산림으로 처음 불린 이들은 서인의 김장생과 박지계, 남인의 장현광이었다. 이후 노론을 대표하는 산림
으로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상하, 김창흡 등이 있고 ,소론으로는 윤선거, 윤증, 박세채 등이 있었다. 남인
으로는 윤휴, 허목, 정시한, 이현일 등이 꼽혔다.
붕당정치가 개화하면서 본격화된 산림의 활동으로, 17세기 조선은 주자학의 이상을 가장 잘 실현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환국기를 지나면서 산림의 위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당 사이의 대립과 논쟁이 격화됨에 따라 산림이 공론
이 아니라 자기 정파의 이해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대안으로 탕평정치가 전개되
고 국왕이 군사(국왕이자 사대부의 스승)를 자임하며 성왕을 표방하자, 산림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격하되지 않을수
없었다. 사회의 변화도 산림의 지위가 떨어진 원인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도시의 문물이 흥기하고 학문이 전문화
되어 갔으며 새로운 학문 풍조가 생겨났다. 이런 변화속에서 향촌에서 유교경전 위주로 공부를 하던 산림의 사회 인식
과 식견은 뒤떨어지지 않을 수 없엇다.
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조 대에 현저히 축소되며 정조 대에서는 노골적으로 친왕적 속성을 드러내는 산림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세도가문의 식객과 같은 인물도 나와 산림은 점차 형식적인 지위로 전락해 갔다. 산림
의 위상저하는 붕당정치가 유례없이 강했던 한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참고)
1. 조선시대 당쟁사/ 이성무 지음/ 아름다운 날
2. 17세기 대동의 길/ 문중양등 지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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