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은 선조대에 동인에서 갈라져 나왔다. 당시 남인은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결집해 있었다. 이후 남인은 경상 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영남 남인과 중앙에서 벼슬을 하며 생활 근거지를 서울 주변 경기 일대로 옮긴 근기남인으로 분화되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정계에서 축출됐다. 이 과정에서 영남 남인은 이현일을 중심으로 뭉쳤고, 근기남인은 허목과 이익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영남남인은 벼슬을 하지 않고 지방 지식인으로 있으면서 심성론과 예론 연구에 몰두하는 등 보수적 주자학풍을 유지했다. 반면 근기남인은 전통 주자학과 다른 독특한 학풍을 형성해 갔다.
근기남인의 학통은 정구-허목-이익으로 정리되었다.
한강 정구는 조식과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그의 학맥은 조식의 문하로 분류되지만 정치적 입장은 이황의 문인들인 남인들과 함께 했다. 광해군 시절에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구하려 했고 인목대비의 폐서인에 반대했다. 예학에 밝았다. 이런 이유로 북인, 남인과 두루 교분이 있었다.
허목은 정구 문하에서 공부한 것은 몇달 안되지만 숙종의 의지로 정구의 수제자 위치에 올랐다. 윤휴와 유형원은 근기남인의 학통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근기남인의 학풍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윤휴는서인 송시열 중심의 예론에 맞서 남인의 이론가로 활약했다. 유형원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했고 노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근기남인의 학문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허목, 윤휴, 유형원. 이익은 모두 본래 북인이었지만 남인으로 바꾼 집안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벼슬길이 막히자, 소북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북인이 남인으로 당색을 바꾸게 된다. 이들이 근기남인의 주축이 되었다.
본래 북인은 전통 성리학과는 다른 학풍을 견지하고 있었다. 근기남인 역시 그러한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그들의 학문 태도에서 가장 특징점은 서인, 나아가 노론의 주자학 일변도 학풍에 반발했다는 점이다. 이는 사서에 주희가 달아놓은 주석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윤휴의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서인이 사서를 중시하며 주희의 해석을 철저히 따른 데 반해 근기남인은 원시유학인 육경 공부를 중시했다. 허목은 육경이야말로 유학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고, 윤휴 역시 육경을 중시했다. 육경 중심 학문성향은 유형원, 이익등 근기남인 학자들에게 계승되면서 영남남인과도 구분되는 학풍으로 자리잡았다.
육경을 중시한다는 것은 하.상.주 삼대를 이상으로 설정했음을 의미한다. 근기남인은 기본적으로 삼대의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국왕을 정점으로 한 통치체제의 정비, 토지 제도의 개혁등 일련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육경은 공자 이전 고대 중국의 문물과 예제를 주로 설명한 경전들이다. 그 사회에서는 사대부가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대체적으로 국왕과 민 일반의 구도가 중심이었다. 따라서 사대부의 특별한 위상을 강조한 성리학과는 국가운영의 지향이 달랐다.
이러한 근기남인의 학문은 이익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그의 학문에 감명을 받은 이들이 모이면서 숙종 46년을 전후해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익의 수제자인 안정복을 비롯해 윤동규, 신후담, 이병휴등으로 모두 남인이다. 이익은 당대 근기남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익은 근기남인 선배들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학문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익이 학문의 폭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청을 통해 활발히 들어오던 서학의 성과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익은 천문. 역법. 지리등을 중심으로 서양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그러한 성과를 적극 수용했다. 이러한 이익의 영향으로 그의 문인들도 서양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익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호의적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부정적으로 변했다. 특히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이나 영혼불멸설을 배척했다. 만년인 영조 33년(1757) 안정복에게 보낸 서한에서 구라파의 천주교는 내가 믿는 바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천주교에 대한 이익의 이런 양면적 태도 때문인지, 그의 문하는 천주교를 적극 수용한 권철신-정약용 계열과 천주교에 반대해 척사론을 제기한 안정복-황덕길 계열로 분화했다. 권철신 계열은 다분히 탈주자학적 학문 태도를 견지하다가 천주교를 수용한 데 반해 안정복 계열은 보수적 주자학풍으로 회귀하면서 천주교 배척에 나섰다.
한편 유형원과 이익은 근기남인뿐 아니라 노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은 그 가치가 인정되어 영조 46년 왕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 책은 노론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읽히면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익의 성호사설 역시 일부 노론학자들에게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로 볼 때 남인의 학문과 노론의 학문을 대립적, 단절적으로 파악하는 시각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서적)
1. 18세기(왕의 귀환)/ 김백철등 지음/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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