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철원 궁예도성 고찰

정암님 2019. 1. 30. 15:08


904년 궁예는 송악을 포기하고 다시 옛근거지인 철원을 수도로 삼았다. 이곳에 청주 주민 1000호를 이주시키고 도성 조성공사를 시작했다. 905년 궁예는 철원으로 입주했고 궁전과 누각을 계속 화려하게 지어댔다.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힘든 일이 끊일 새가 없었으니 원망이 크게 일었다." 는 고려사의 기록은 궁예도성의 규모가 크고 백성들의 노역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이 궁궐의 터가 지금의 철원군 북쪽 비무장지대 안인 구철원의 홍원리, 월정리 지역에 남아 있다. 외성 둘레 12.5Km, 내성 둘레 7.7Km,  왕궁성 둘레 1.8Km로 이루어진 삼중성이다. 도성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외성은 토성으로 축조되었다. 




궁에도성의 입지와 형태는 특이하다. 

첫째. 평지성이다. 

한반도의 도성 중에서 평지성은 매우 드물다. 즉 한국의 역사에는 여러 왕조가 있었지만 도성의 입지조건은 비슷했다. 평야지대지만 북쪽에 산줄기, 남쪽에 강에 있어(배산임수) 방어에 유리하고, 수로가 뚫려 있어 교통과 수송이 편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산과 강의 조화로 왕과 귀족들이 살 만한 배산임수형 택지가 넉넉해야 한다. 

그러나 궁예 도성은 그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보편적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궁예도성은 한국전쟁기 최대 격전지였던 철의 삼각지 한복판, 그것도 백마고지와 김일성 고지 사이의 허허벌판에 자리잡고 있다. 궁예도성의 한가운데로 휴전선이 지나가고 도성의 북쪽 끝은 북방한계선에, 남쪽끝은 남방한계선에 걸쳐져 있다. 기이한 운명이다. 거기에다 하나 더...궁예도성은 직사각형 형태지만 전체적으로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하게 놓여있다. 이 도성의 중앙으로 경원선 철도가 지나간다. 도성이 산등성이와 평야가 만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허허벌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산들은 야트막하다. 백마고지만 해도 지도상으로는 해발 375m지만 철원평야 자체가 해발 220m의 고원지대라 평지에서 솟은 높이는 100m도 안된다. 주변의 산들도 다른 산지처럼 이어지지 않고 피라미드 또는 피라미드 몇 개를 합친 것처럼 점점이 놓여 있다. 철원평야의 독특한 풍경은 이곳의 생성과정 때문이다. 오래전 지금의 저격능선이 있는 오성산이 폭발하면서 쏟아져 나온 용암이 호수처럼 이 지역을 가득 메웠다. 덕분에 해발 수백 미터가 넘는  지역에 두 개의 고원이 형성되었다. 북쪽 고원이 평강고원이고 남쪽이 철원평야다. 철원의 평화전망대에서 보면 두 개의 평평한 고원이 놓여 있는 독특한 풍광을 볼 수 있다. 넓이는 평강고원이 더 넓지만, 궁예가 남족 철원평야에 자리잡은 이유는 물 때문인 듯하다. 용암 대지라 지질이 현무암인데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은 물을 담아 두지 못한다. 그래서 평강고원에 내린 빗물은 모두 땅에 스며들어 고도가 낮은 철원에서 샘과 개울을 이룬다. 단 평원의 북쪽, 김일성고지부터는 완전한 산악지대로 산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다.

둘째, 규모가 당시로서는 대단히 컸다.

궁예도성의 외성 둘레는 무려 12.5Km이고 내성은 7.7Km이다. 풍납토성 3.5Km 경주 월성 1.8Km 고구려 국내성이 2.7Km였고 백제와 신라의 도성도 고작 수 킬로미터였다. 평지가 아니라 산굽이를 따라 굽이굽이 쌓았던 한양도성이 18Km이니 그 규모가 당대인들에게 얼마나 대단하게 보였을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곳은 도성의 입지가 아니다. 

철원의 장점은 철원평야와 바로 북쪽의 평강고원이라는 두 개의 좋은 평야다. 둘의 면적을 합하면 서울보다도 넓다. 토질도 좋아서 철원평야는 한국에서 드문 충적평야 지대다. 

그러나 교통이 매우 좋지않다. 우선 한강이나 예성강처럼 수로가 통하는 강이 없다. 육로도 불편하다. 수도의 목적은 웅거가 아니라 통치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되려면 교통과 운송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수도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즉 소비도시다. 관료와 가족들, 노비들이 살아야 하고 군대가 주둔해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유동 인구도 많다. 이들이 먹고 살려면 식량도 있어야 하고 오만 가지 물자들도 필요하다. 그런데 교통이 불편하니 곡물값은 물론이고 물건값이 무섭게 폭등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가뜩이나 부족한 평야에 대규모 도성을 축성했으니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것이다. 궁예시절 철원에서 가는 포 한필로 살 수 있는  쌀이 5되(15되가 1석)에 불과했다. 전쟁시대였던 태종무열왕 때 경주에서는 포목 한 필에 벼 30~50석이었다.(삼국유사) 조선시대의 경우 한 필에 20~40되(1.5~2.5석)였다. 조선시대 생산량이 두 배가 늘었다고 가정해도 철원의 물가는 정상 물가의 2~4배가 된다. 인구의 80%가 겨우 끼니를 해결하던 시대였다. 쌀값이 두 배가 되면 당장 식사량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 궁예 자신을 위시해서 철원 주변에 땅을 가진 소수 특권층에겐 이런 사태는 큰 득이 된다. 쌀값이 뛰면 당장 수입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배충과 관료 중에서 그런 재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그뿐인가, 세상의 불안 중에서 가장 무서운 불안은 식량 불안이라 했다. 서민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성한 정권은 없었다. 궁예의 지지도가 바닥을 기었을 것이다.



궁예는 왜 이런 곳에 도성을 세웠을까? 고구려 고토의 수복? 말이 안된다. 이 자가 진정 북진을 원했다면 단순 직선거리가 아니라 도로와 보급물자의 수송, 이동의 편리함등을 더 중시해야 했다. 그런 곳이라면 개경이 더 낫다.

그럼 후삼국의 쟁패기였으므로 요새지를 찾아 온 것일까? 철의 삼각지라는 이름 덕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이 곳은 요새지가 아니다. 주변에 높고 험한 산도, 강폭이 넓은 대하가 흐르는 곳도 아니니까...

한마디로 궁예는 안목이 좁은 자다. 그는 산채의 산적두목도 아니었고 작은 지방에 웅거하는 호족도 아니었다. 그는 나름 한 왕조의 창업자를 꿈꾸던 자였다. 꿈은 컸다. 국호로 사용했던 마진은 동방의 큰나라, 태봉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 정도의 의미니 말이다. 하지만 꿈에 비해 역량은 부족했다. 역량이 부족하면 인재를 포용해야 하는 데,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도력에 한계를 느끼자 궁예가 사용한 것은 자신을 신으로 자처하며 공포정치를 편 것이다. 독심술이란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사람들을 죽여대다 보니 앞에서는 굽신거렸지만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들이 폭발했을 때, 궁예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궁예도성 역시 안목이 부족했던 자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체다.


참고)

1. 한국고대전쟁사 3/ 임용한 지음/ 혜안 간

2.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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