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서평)

책을 읽고) 지정학의 포로들

정암님 2019. 2. 3. 08:01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한겨레 출판 / 2018년 간


1500년대 서방 해양세력이 도래한 이후 한반도는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소련과 미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완충 지대가 되느냐 교두보가 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려왔다. 열강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 충실히 기능하면, 한반도는 안보가 보장되면서 전쟁과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는 주변 열강의 세력 변동이 생길 때마다 우월한 열강의 교두보로 전락했다. 이는 전쟁과 참화로 이어졌다.


지금 한반도의 분단 체제는 미.중.일.러가 자국의 이해에 따라 타협해서 한반도에 강제한 완충지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에게는 비극이고 , 극복해야 할 체제이다. 하지만 이 분단 체제 때문에 한반도에 '불안정한 안정'이나마 유지되는 역설이 존재한다. 한반도에 관한 열강의 최대 관심사는 한반도가 상대의 영향권으로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은 먼저 이 분단체제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상은 분단체제의 극복이나, 현실은 그 관리가 돼야 한다. 이는 분단 체제가 주변 열강의 세력균형 차원에서 성립된 것을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진보의 민족통일론이나, '북한은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흡수통일해야 한다'는 보수의 반공통일론은 위험한 이상주의다.


현재 한반도 평화의 최대 위협인 북한의 핵개발은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등 유라시아 대륙세력의 급속한 위축을 배경으로 한다. 북한의 후견세력인 러시아와 중국은 세력이 약화됐고 한국과 수교했는데,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지 않았다. 고립된 북한은 핵개발로 자구책을 찾았다. 이처럼 북한도 생존과 국익을 챙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집단일 뿐이다.


미국의 지정학자 스파이크먼은 "열강사이의 세력 투쟁이 기본적인 국제관계에서, 작은 완충국가의 운명은 아무리 잘해야 위태로울 뿐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개발로 요동치는 한반도에서 분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세력을 찾아 보기 힘들다. 적개심에 불타거나 환상에 젖은 자들뿐이다. 이들 모두 한반도를 파국으로 몰고갈 수 있다.


우리가 생존할 길은 분단 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해 공존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것뿐이다. 남북한 두 정권 모두가 주변 열강과 안정적 관계를 구축하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가 특정 열강의 교두보가 아니라 양 진영의 완충지대로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야 한다. 이는 결코 분단 체제의 영구화가 아니다. 주변 열강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공존 체제로의 안정적 전환이야말로 분단 체제의 평화적 해소로 가는 길이다. 분단 체제의 극복은 분단 체제가 생겨나고 작동하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정학은 한 국가의 운명은 그 나라의 위치와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쩌랴..우리가 한반도에 태어난 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인 것을..태어난 이상 이 땅을 우리 모두가 안정되고 잘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 또한 우리의 숙명이다.  정의길은 통일에 대한 환상 혹은 적개심으로 붙타는 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들에게 좀 더 냉정한 현실을 이야기해 준다. 강대국의 역학 관계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약소국 국민으로서 열불터지는 일이지만, 전쟁과 참화를 막고 공존 체제를 유지하다 보면  어쩌면 먼 훗날 통일된 한반도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이책은 지정학의 시각에서 본 강대국들의 흥망사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 있는 매우 드문 책이다. 국제 정세를 보는 시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추한다. 정의길의 또 다른 저작인 <이슬람 전사의 탄생>도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