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50여년 전 ‘식민지배 불법성’ 적시 없이 불완전 역사청산
ㆍ안보·경제적 명분 힘 잃어…사법적 해결은 정치적 부담
ㆍ‘일 기업자산 매각 현금화’ 급한 불 끈 뒤 ‘미래’ 모색을
강제징용 판결로 촉발된 한·일 충돌은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50년 이상 지속됐던 ‘1965년 체제’가 더 이상 한·일관계를 유지시키는 버팀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따라서 이 문제만을 봉합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한·일관계가 예전처럼 회복되기는 어렵다.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 긴급 처방과 함께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장기적·구조적 방안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한국 외교가 사상 최대의 난제를 만난 셈이다.
■ 한계 드러낸 1965년 체제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적시되지 않았다. 한·일관계는 과거사 정리와 진정한 화해 없이 출발했다. 그럼에도 한·일은 안보·경제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성장과 냉전 종식으로 양국 관계를 묶어주던 안보·경제적 끈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한·일 충돌이 잦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발생한 초계기 사건, 이번에 일본이 ‘안보 문제에서도 한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 등은 아무리 갈등이 커져도 안보협력이라는 대명제 앞에서는 자제했던 과거의 한·일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한·일관계의 구조적 모순을 정조준하고 있다. 판결의 핵심 요지 중 하나는 일제 식민지배가 불법이므로 강제징용도 불법이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의 논리는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국가 동원령에 따라 ‘자국민’을 데려간 것이기 때문에 강제동원은 있었으나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제징용 판결로 식민지배 불법성에 대한 한·일 간의 불일치는 그대로 둘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전직 당국자는 10일 “한·일 충돌은 강제징용 판결 하나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라며 “한·일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의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사법적 해결은 가능한가
강제징용 논란을 종식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법적 해결이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누구의 말이 옳은지 판단을 구하면 된다. 이 같은 해결은 대법원 판결 취지와도 부합한다. 일본은 ICJ 제소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의미다.
소수이긴 하지만 국내에서도 한국의 승소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강제징용은 국제적 강행규범을 위반한 사안이므로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 주된 논거다.
그러나 ICJ를 통한 사법적 해결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외교적 부담을 초래한다. 국가의 운명적 사안을 국제사법적 판단에 맡길 수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를 ICJ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현재 ICJ 제소를 정책적 선택지로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정부 당국자는 “ICJ 제소는 승패와 무관하게 한·일관계를 끝장낼 수도 있는 길”이라며 “정부의 목표는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는 것에 있기 때문에 ICJ 제소는 현실적 해법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 장기적 해법 모색해야
정부는 지난달 19일 ‘한·일 기업의 위자료 지급’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 제안은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늦었고 제안 방법도 서툴렀다는 평가 받았다. 하지만 이는 최종 해결책이 아니라 외교적 해결을 위한 ‘논의의 기초’로 삼자는 제안이다. 이 제안을 중심으로 한·일이 머리를 맞대고 외교적 해결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미다. 일본이 즉각 거부했지만 이 제안의 유효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부가 ‘발등의 불’을 끄려면 일본이 보복조치를 철회하고 외교적 협의 테이블에 앉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의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는 것을 중단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 해도 궁극적 해결은 될 수 없다. 정부의 6·19 제안에는 대법원 판결이 지적한 ‘식민지배 불법성에 대한 한·일 간 해석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봉합에 성공한다 해도 구조적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한·일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단기적 해법과 동시에 1965년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협력모델을 찾기 위한 한·일 공동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일관계의 미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출처) 경향신문/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입력 2019.07.11. 06:00 수정 2019.07.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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