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는 기독교 내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다.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구원 받을 자를 자유롭게 선택하는가?(구원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논쟁 중 하나였고, 결국 카톨릭과 개신교가 분열한 가장 근원적 이유였다.
직관적으로 보면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고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의 전능은 거기에 제약받게 된다. 즉 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은 한계가 생기게 된다.
반면 개인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은 신의 의지에 따른다는 두번째 주장은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산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고통과 악을 왜 방치하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논쟁은 신학적으로 다음 세가지 견해가 병립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겨진다. 신은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즉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에 대한 징벌이다.
5세기에 그런 주장이 태동했을 때,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던 기독교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해답을 용납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고, 최고의 은사인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얻어낼 만큼(비록 선행과 계율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자족적이라면 예수가 육신을 입고 내려와 십자가에서 희생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신의 은총 앞에서의 겸허함을 스스로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바꿀 것이다.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갈수록 자유의지를 긍정해갔다. 교회의 예식과 절차(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사 참례 등등)는 그것들이 참여자들에게 일정한 효과를 주지 않는다면 계속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앙과 계율을 잘 지키고 선행을 해도 신의 총애를 받거나 신에게 점수를 딸 수 없다면 믿음을 오래 유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신앙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교회의 복잡한 예식들로 전달 강화될 때, 감사와 은총의 신학은 피치 못하게 자부심과 자기 구제의 신학으로 변모한다. 이것이 적어도 마르틴 루터가 자기 시대의 로마 교회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에서 태동했다. 당시 카톨릭에 대한 루터의 저항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일탈에 대한 것이었다. 부자들이 구원을 돈으로 사는 부패한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반발에는 보다 근원적 회의가 있었다. 루터는 구원이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관점을 가졌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다. 미사 참석이나 선행, 면죄부로 신을 윽박질러 우리의 구원받을 자격을 인정하도록 하는 일은 신성모독이다. 이것이 루터의 근원적 회의였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반 자유의지론이었다. 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예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심어준다.
청교도에 큰 영향을 미친 장 칼뱅은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의 행위나 자격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보았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받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삶은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칼뱅의 예정론은 견디기 힘든 압박감을 주었다. 사후에 가게 될 자리가 현세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 사후에 자신의 위치를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일 것이다. 그러나 신은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행동을 보고서 누가 구원을 받을지 단죄받을지도 판단할 수 없다. 독실한 신자들에게 '나는 선택받았을까? 만일 받았다면 그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지속적인 절박감을 안겨주었고, 이는 칼뱅주의자들에게 일종의 직업윤리의식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 핵심은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었다. 돈을 벌어 마음껏 써보려 일하는 것은 일탈이며, 부패로 여겨졌다. 칼뱅주의는 근면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다. 베버는 칼뱅주의의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방식이 부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평생 묵묵히 힘들게 일한 삶, 그것은 분명 구원의 티켓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장본인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될 수 있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명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해갔다. 즉 세속적 행위를 구원의 증표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심리적으로 신이 그의 영광을 높여줄 신실한 노력을 일체 외면한다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에 따라 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단순한 징표가 아닌 구원을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만연하자, 칼뱅주의자들은 때때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한 자라 표현하고 , 더 정확하게는 자기 구원의 확신자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칼뱅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이 결합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는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는 노동 분업에 신성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경제 질서가 섭리의 작용이라는 생각을 지지해준다.
세속적 활동으로 자신의 구원 여부를 증명한다는 사고는 역설적으로 현대의 능력주의를 태동시켰다. 세속적 성공이 구원이라는 생각은 성공으로 이끄는 능력에 부정할 수 없는 정당성을 부여했고, 이는 현대 사회의 도그마가 되었다. 신은 전능한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현대 능력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참고)
1.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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