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는 독특한 면이 있다. 대부분의 절집은 깊은 산중이나 시내에 위치하지만, 신륵사는 남한 강변의 높직한 절벽위에 자리잡은 강변사찰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여느 절집과 다른 풍광을 볼 수 있었다. 절벽 아래로 쪽빛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건너편에는 4대강사업으로 지금은 사라진 은모래 백사장이 있었다. 시인묵객들이 경탄했던 신륵사의 아름다움이란 곧 신륵사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아름다움이었다.
한강은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 앞으로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를 여강이라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여주시 점동면 삼합리부터 금사면 전북리까지 총 4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백리 물길을 여강이라고 한다. 이 백리 물길 중에서 가장 수려한곳이 신륵사이고 신륵사에서 풍광이 으뜸인 곳은 강변 정자인 강월헌이다.
4대강 사업으로 백사장도 사라지고 강변도 밋밋해졌다.
강월헌
신륵사는 고려말 고승이었던 나옹이 주살된 곳이다.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신륵사는 원래 절의 위상이 높지 않았다. 고려조 3대 선원의 하나였던 여주 고달선원에 비하면 말사정도의 위치였다. 그런 신륵사가 절집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고려 우왕 2년(1376)나옹이 이곳에서 사망하고 승탑이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원 지배시기, 친원 모리배들과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쥐고 전횡했다. 한 때 개혁결사를 주도하며 불교계의 주류가 되었던 지눌의 수선사계 역시 타락했다. 공민왕이 부원세력을 숙청했지만 거듭된 외침과 권문세족의 반발에 개혁은 좌절되고 권력은 다시 권문세족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불교계 역시 권문세족의 일파였던 태고 보우(현 조계종의 중조)세력이 주도했다. 하지만 보우와 대립했던 일단의 세력이 있었다. 나옹, 무학 세력이었다. 나옹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을 주창했다. 앉아서 참을 구하는 수행법을 멀리하고 편력의 도정에서 중생들을 제도했다. 염불은 곧 참선이라 하며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대중은 나옹을 생불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우왕 2년(1376) 나옹은 자파 세력의 본산지로 양주 회암사를 준공했다. 낙성식이 열리자 서울과 지방에서 사부 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끊이질 않았다. 권력을 쥐고 있던 권문세족은 경악했다. 그만큼 나옹의 대중적 인기는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양주라면 개경의 지척아닌가..마침내 나라의 관리가 나와 산문을 폐쇄하고 왕래를 금지시켰다. 나옹에게는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그 여정 중 신륵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무학을 중심으로한 나옹의 잔존세력과 화엄종 세력은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를 멸망시켰다.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나옹 세력은 불교계의 주류가 되었고 , 이는 지공-나옹-무학의 삼화상 숭배의식으로 나타났다. 주요 사찰마다 삼화상의 초상화가 걸렸다. 하지만 억불 정책의 강도가 나날이 심해지면서 마침내 연산군은 선,교 양종과 승과를 폐지시켜 무종무파의 불교를 만들었다.
명종조의 승려였던 보우의 말을 들어 보자.
모든 나라안의 사찰이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훼손되어 산에는 절이 없고 절에는 스님이 없어, 요행히 총림아래 머리를 깎고 물든 옷 입은 사람도 관리가 침범하고 속인들이 재앙을 일으켜 눈에는 눈물이 있었고 그 눈물에는 피가 있었다. 장차 외로운 명맥을 남길곳도 없어지고 형세는 궁극하여 길짐승으로 전락하고 빛남을 감추었다.(허응당집)
문정왕후의 지원을 받은 보우의 노력으로 16년간 5000여명의 중들과 수백명의 승과 합격자들이 배출되었다. 유림의 표적이 된 보우는 주살당했지만 그가 배출한 승려들이 이후 불교 중흥의 대들보가 되었으니 원은 없었으리라. 그들중에 휴정(서산대사)이 있었다. 오늘날 조계종의 사실상 창립자다. 임진왜란때 승병 오천 명을 동원했고 그 활약으로 불교는 사실상 조정의 공인을 받았다. 휴정은 조계종을 재건하고 법통을 정비하면서 자신의 계보를 고려말의 태고 보우와 연결시켰지만 오늘날 연구에 의하면 둘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
그렇다면 왜 태고보우를 법통에 넣었을까? 나옹-무학 계가 조선조의 주류였는 데 말이다. 나름 이해가 된다. 불교는 조선이 개국하면서 거의 멸문지경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몰골을 만든 조선 개국에 협력한 자들이 누구인가? 나옹계였다. 그런 나옹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리라..이후 조선 불교계에서 나옹계의 자취는 거의 지워졌다. 삼화상의 초상이 남아있는 절도 극히 드물다. 나옹과 깊은 인연이 있는 신륵사 외에 어디가 있을까?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청산은 나를 보고>다.(저자가 다른 승려 혹은 중국의 한산이라는 설도 있다.)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에서 딴 이름이다. 나옹이 신륵사에서 죽은 후 추모의 뜻을 담아 세운 정자다. 원래 삼층석탑 바로 곁에 있었는데1972년 대홍수로 정자가 떠내려가자 약간 자리를 옮겨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것이다. 정자에 올라서면 눈 앞에 여강 물줄기가 장하게 펼쳐지고 강 건너 은모래 백사장의 수려한 풍광이 한 가득이었다는데 4대강 사업으로 사라져서 지금은 볼 수 없다. 해질 녘에 정자에 앉아 보랏빛으로 바뀌는 강물을 바라보며 신륵사의 은은한 종소리를 듣는 것이 여주8경의 으뜸인 신륵모종이라는 데 세상 살이가 바빠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나옹의 화장터에 세웠다는 삼층석탑
강월헌이 있는 신륵사 강변의 절벽을 절집에서는 동대라고 부른다. 동대에는 아담한 삼층석탑과 높이 치솟은 벽돌탑이 있다. 원래 탑은 법당 앞에 놓이는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장식품으로 소모되었다. 절벽 위에 높이 솟구친 벽돌탑은 이정표 구실을 했을 것이다. 전근대시절에는 강이 고속도로였다. 조선 역시 수운을 물자운송에 이용했다. 남한강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의 물산과 세곡이 서울로 올라오는 통로였다. 따라서 강 요소요소에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필요했으리라..더구나 여주는 나루가 많았다. 조선조 4대 나루 중 조포나루와 이포나루가 있을만큼 수운의 요지였다. 신륵사 아래가 조포나루터다. 벽돌탑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고려 때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영조2년(1726)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벽돌탑에서 조금 올라가면 대장각기비가 나온다. 깨지고 부분부분 훼손됐지만 이래봬도 국가 보물이다.
고려말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들과 함께 발원하여 고려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이 후 그 전말을 이 비에 새겼다. 비문은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권주가 썼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비신은 대리석이라 조각이 정교하고, 대리석이 풍화에 취약함에도 상당 부분이 잘 남아있다. 이 비는 고려 양식에서 조선 양식으로 이행하는 석비 변천의 과도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자세한 설명은 2편에서 하겠다.
본전인 극락보전
신륵사의 본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보전이다. 보물로 지정된 아미타여래삼존상이 있다. 재질은 나무다. 초파일에 갔기 때문에 인산인해다. 유명한 절집이라 문재인, 남경필등 정치인들과 조계종 총무원장인 설정의 이름이 보인다. 최근 그의 숨겨둔 처자식, 학력위조,재산문제를 고발한 MBC 피디수첩과 치열한 고소고발전을 펼치고 있다. 싸움에 임하는 결의가 대단하다.
한국 석탑의 전형은 석가탑이지만 극락보전 앞의 다층석탑은 그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원각사지 십층 석탑과 조각 기법이 비슷하다고 안내판에는 써있다. 원각사지 탑은 경천사지 탑을 모방한 것이다. 경천사지 탑은 원의 기술자들이 고려로 와서 만든 100% 외래종이다. 나옹계는 원나라 유학생들이 많았다. 이런 학풍이 원나라 조각 기법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을까? 또한 이 탑들의 재질은 모두 대리석이다. 토종 석탑들은 화강암인데 말이다. 대리석의 질감은 우아하다. 재질이 물러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다. 다만 비 바람에 쉽게 풍화, 마모된다. 이 탑 역시 풍화를 피하지 못했다. 조선 성종 3년(1472)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극락보전 뒤쪽으로 가면 조사당이 나온다. 아담한 규모지만 팔작지붕을 올려 화려함을 더했다. 선종은 조사를 불보살보다 더 존숭한다. 그로인해 사제간의 위계가 철저하며 그 패단이 문중간 파벌싸움이다. 한국 조계종이 개혁이 지연되고 구태가 누적되는 악습은 지도부를 몇몇 거대 문중이 야합으로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조사당은 조사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선종 사찰에서는 매우 중시하는 곳이다. 안을 들여다보면 중앙에 지공이, 양측에 나옹과 무학의 진영이 놓여있다. 이 삼화상진영은 나옹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해지는 천여 점의 진영 가운데 삼화상을 그린 작품은 매우 드물다.
조사당은 조선 전기의 조각 기법이 보여 예종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 건물들은 남아있는 것이 십여 채가 안될 정도로 드물다. 양대 병난에 대부분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사전 앞마당의 향나무는 수령이 600여 년 된 고목이다. 고목만큼 고찰과 잘 어울리는 것은 없다.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단다.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명부전의 등불은 흰색이다.
주인을 모르는 승탑들이 외진 곳에 서 있다.
무명인 승탑에서 바라본 조사당
참고)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편 남한강편/ 유홍준 지음/ 창비/ 2015년
2.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 연구/ 황인규 지음/ 혜안/ 2003년
3. 한국 불교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조계종출판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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