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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답사기 2편) 적자 생존의 시대

정암님 2018. 6. 23. 20:00


나옹이 주살된 후 제자들은 그의 장례를 정성을 다해 치렀다. 신륵사 동대에서 시신을 화장하고, 그곳에 삼층석탑과 강월헌을 세워 선사의 행적과 뜻을 기렸다. 사리는 둘로 나누어 나옹이 주석했던 양주 회암사와 이곳 신륵사에 승탑으로 모셨다. 나옹의 승탑은 조사당 뒤쪽의 낮은 언덕 조용한 소나무숲에 안치되었다. 서남쪽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은 명당으로 알려졌다.우왕 5년(1379)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선사 사망 후 3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모든 기물이 기존 관행을 뒤업고 파격적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묘역은 사리탑인 승탑과 행적을 적은 비석, 이를 지키는 석등이 하나의 평면에 세트로 세워졌다. 이런 구도는 나옹 승탑 묘역이 최초이다. 승탑은 기존의 팔각당 형식 대신 석종이라는 새 양식을 취했다. 석등도 대리석에 불밝이창을 내면서 독특한 모습을 보였다. 비석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었다.



보제존자 석종 승탑

                                       대리석 재질에 불밝이창을 8개 내고 이무기와 비천상을 정교하게 새겼다.


661년 김춘추가 사망하자 문무왕은 아버지의 무덤에 돌거북 받침(귀부)과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리돌(이수)을 갖춘 중국식 비석을 세웠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석을 세우거나 비석을 땅에 묻었다. 문무왕이 세운 비석 형식은 곧 대유행을 해서 고려 말기까지 이어졌다.


                                        고려말까지 유행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전통적 탑비  출처:문화재청


고려말이 되자 탑비의 형식은 단순화되기 시작했다. 돌거북(용) 받침은 단순한 사각형 받침으로, 용 모습이 새겨진 머리돌은 지붕 모양 머릿돌로 간략화되어 조선조에 대중화되었다. 그 이행기의 모습이 나옹선사 탑비다. 받침이 사각형으로 단순화되고 지붕머리를 얹었지만 비는 대리석으로 만들고 비의 몸체 양쪽에 돌기둥을 세워 단단하게 유지시키고 있다. 돌기둥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일주문으로 나가는 마당에 뜬금없는 김병기 송덕비가 서 있다. 김병기가 누구인가?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을 떨던 철종 말년기, 권력의 핵심이었던 자였다. 왜 그 자의 송덕비가 절집안에 서 있을까? 여기서 조선조 절집들의 피눈물나는 생존경쟁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옹계는 불교계의 주류가 되었다. 성지인 신륵사의 위상도 비할 수 없이 커졌다. 허나 영광은 짧았다. 곧 억불정책이 본격화되었고 신륵사는 쇠락을 넘어 폐사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천우신조인가..예종1년(1469)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의 영릉이 여주로 이장되면서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났지만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다시 중수되기 시작한 것이 현종 12년 무렵이었다. 조선조 절집의 삶은 고달펐다. 걸핏하면 관리들과 양반토호들이 몰려와 재물을 약탈하고 중들을 부려먹었다. 이렇게 시달리다 중들이 떠나고 폐사된 절들이 그 얼마던가..절집이 살아남을려면 왕실이나 유력가문의 원찰이 되어야 했다. 중들은 필사적으로 로비를 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들은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조정은 중들의 쓰임새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암묵적으로 승인하되 군역과 부역을 물리는 것이 더 이익이었다. 상층부 중들은 감투를 쓰고 나름 위세를 떨었지만 평범한 중들은 징발돼 산성을 쌓고 경비를 섰다. 해제되어 돌아오면 온갖 부역이 밀려있었다. 종이, 차, 숯, 향, 두부, 산삼, 베등 할당된 공물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더구나 중들을 헐값에 부려먹으려고 관청들과 토호, 서원등은 서로 다투었다. 양반들은 중들을 잡기 위해 절집도 지어주었다. 물론 그 댓가는 고달펐다. 많은 중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절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세도정치기가 되자 좌절하고 분노하는 양반들과 평민 지식인들이 늘어났다. 유교는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현세에서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강요했다. 답을 찾지 못한 그들의 시선은 불교로 향했다. 스스로 불경을 읽고 신도가 되는 거사들이 증가했다. 권력층에서도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났다. 안동김씨는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물론 중들도 왕실과 유력가문의 원찰이 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신륵사가 결정적으로 흥기한 시기는 철종9년(1858) 안동김씨였던 순조비 순원왕후가 내탕금을 내어 크게 불사를 일으켰을 때였다. 여주에 근거하던 김병기 역시 후원금을 지원했다. 중들은 송덕비를 세워 이 사찰이 안동김문과 관계있음을 널리 알렸다. 누가 감히 신륵사를 침탈하겠는가? 왕실과 안동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데 말이다.



신륵사는 나지막한 봉미산의 느슨한 비탈을 타고 10여채 남짓한 건물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절집이다. 느슨한 오르막길이라 각 건물의 지붕들이 높이를 달리하며 이리 겹치고 저리 겹치며 층층히 그리는 한옥의 곡선미가 일품이다. 하지만 옛날의 한적한 산사는 사라졌다. 신륵사가 관광특구가 되면서 그 앞은 시장바닥이 되었다. 그래서 속세와의 경계를 더욱 뚜렷이 할 모양인지 크고 우람한 일주문을 세웠다. 한적한 산사라면 어울리지 않는 문이다. 거기에 4대강사업으로 강변은 밋밋하고 건너 은모래 백사장은 사라졌다. 이것이 작금의 신륵사다. 입장료는 성인 2200원이다. 


참고)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편 남한강편/ 유홍준 지음/ 창비/ 2015년

2.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 연구/ 황인규 지음/ 혜안/ 2003년

3. 한국 불교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조계종출판사/ 2011년

4. 부처 통곡하다/ 정동주 지음/ 이룸/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