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야기

역사를 바꾼 작물들 4편) 감자

정암님 2019. 11. 7. 20:44


감자는 밀, 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다. 현재 125개국에서 연간 3억 톤 이상 생산되어 식량과 가공산업에 이용된다. 그런데 작물의 역사에서 감자만큼 천대를 받다가 가장 좋아하는 식품으로 도약한 극적인 히스토리를 지닌 먹거리가 없다.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감자의 장점과 유용성이 그만큼 빼어났기 때문이다. 감자의특징을 살펴보자.


<감자의 특징>

A> 장점

1. 재배 적응력이 뛰어나다.

:해안지대에서 히말라야나 안데스의 고산지대까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 추운 그린란드까지  재배된다.

2. 최고의 수확량

:파종량 대비 수확량이 1 대 80으로 옥수수를 제외하고는 곡물 중 최고의 수확량을 보여준다.

3. 재배하기가 쉽다.

4. 우수한 영양성분: 주요 무기성분과 비타민 B1, B2, B3, C가 풍성하다.

                                 감자의 100g당 영양성분/ 출처: 농촌진흥청


5. 열에 안정적인 비타민 C가 100그램당 26 밀리그램이나 함유되어 밭의 사과로 불린다.->선원들에게 공포의 괴질이었던 괴혈병에 의한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영국 해군은 감자가 들어간 카레라이스를 개발, 보급했는데, 원래 인도인이 먹던 카레는 수프처럼 묽었지만 해군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먹기 좋게 되게 만들었다. 이 방식이 널리 보급되어 우리가 즐겨먹는 카레라이스가 되었다.

6. 과일과 채소를 통틀어 가장 유용하고 비중이 높은 칼륨 함유량

: 칼륨은 혈압을 올리고 혈관을 손상시키는 나트륨을 배출시켜 고혈압의 방지 및 치료, 골다공증의 예방에 도움이 된다.

7. 다이어트에 좋다.

: 감자는 100g당 열량이 같은 양의 쌀밥 열량인 145cal의 절반인 72cal에 불과하여, 적은 칼로리를 섭취하고도 포만감이 있어 다이어트에 유리하다.

8. 쉬운 조리법

:냄비 하나와 약간의 연료만 있어도 조리 가능하다. 또한 맛이 담백하고 빛깔이 희어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B> 단점

1. 수확시기가 몰려 있고 수분 함량이 80퍼센트에 달해 상온에서 저장성이 나쁘다. 장기 보관하려면 저온에서 보관해야 한다.

2. 독이 있다.

:감자 싹이나 초록색으로 변한 부분은 솔라닌(solanine)이라는 독이 있다. 솔라닌은 현기증과 구토를 유발한다.놀랍게도 치사량은 겨우 400밀리그램이다.


감자의 고향은 안데스산맥의 고원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호 주변에서 7,000년 전부터 감자를 재배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감자는 안데스산맥의 고원으로 퍼져 나가며 잉카문명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식량 자원이 되었다. 안데스산맥은 남아메리카 서안을 따라 남북으로 7,000킬로미터 이상 뻗은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이며 평균 고도가 4,000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다. 이곳은 기후변화와 일교차가 극심해서 밀이나 옥수수, 보리 같은 식물이 거의 자라지 못한다. 잉카인들의 3대 식량은 퀴노아, 옥수수, 감자였는데 옥수수는 워낙 귀해서 고위 엘리트들의 차지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자를 먹었다. 감자는 고산지대의 한랭한 환경에서도 잘 자랐던 작물이었다.


16세기 후반 감자가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감자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우선 감자는 불쾌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감자는 알이 작고 표면이 울퉁불퉁했으며 잘라두면 흰 살빛이 곧 검게 변했다. 쓴맛이 났고 혀를 자극하는 독(솔라닌 성분)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심지어 최음효과가 있다는 말도 나돌았다. 

종교적 편견도 영향을 미쳤다.성경 창세기에는 먹는 식품과 먹어서는 안되는 식품이 엄격히 적시되어 있는데 감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처음 보는 식품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땅속 식물, 가지과 식물은 악하다고 생각하며 천시했다. 하필 감자는 두 분류에 모두 속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감자는 안데스의 황폐한 장소에서 자랐고 페루의 비천한 원주민들이 먹는 음식이었으며 탄광의 광부들이 먹는 노예의 음식이었다. 그러니 유럽의 상류층이 입을 댈 수 있는 식품이 아니었다. 가난한 소작인들도 돼지나 먹는 비천한 음식을 먹는 것을 거부했다. 심지어 기근이 닥쳐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나 도토리, 양치류 뿌리, 나뭇잎으로 연명하면서도 감자에 대해 완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감자가 전해진 16~18세기 유럽에서는 수시로 기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기후로 인한 흉작인 경우가 많았지만 급격한 인구 증가도 많은 아사자를 낸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자는 유럽 북부의 한랭한 기후에 적응해 잘 자랐고 놀랄 만큼 수확량이 높았다. 밀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던 유럽 북부에서는 감자가 귀리나 보리를 대신하는 훌룡한 전분 식품이었다. 감자는 재배하기도 쉬웠고 조리하기도 쉬웠다. 대안은 감자뿐이었다. 유럽 각국은 적극적으로 감자 재배를 장려했고  보급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프랑스의 루이16세, 왕비였던 마리 앙트와네트, 나폴레옹 등도 적극적으로 감자 재배를 독려했다. 상당한 시일이 흘렀지만 결국 감자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독일인들은 1인당 1년에 200킬로그램의 감자를 섭취하는데, 2010년 기준으로 세계의 연간 감자 소비량이 평균 70킬로그램인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양이다. 독일은 세계식량농업기구자료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세계 6위의 감자 생산국이다.


감자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감자마름병으로 주식인 감자가 초토화되자 100만 명이 굶어 죽고 400만 명이 해외로 탈출했던 아일랜드 대기근, 산업혁명기에 하루에 12~16시간을 일하며 요리는 커녕 먹을 시간도 없었던 영국 노동자들의 먹거리였다가 오늘날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된 피쉬 앤 칩스 등등...이처럼 감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졌다. 그에 따라 감자의 위상도 달라졌다.


감자가 굶주린 인간의 배만 채워준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목축문화가 발달했는데 겨울이 오면 가축에게 먹일 먹이가 부족했다. 고육책으로 비축해둔 건초로 일부 가축만 남겨 먹이고 나머지 가축은 도축해서 건조시키거나 소금에 절여 겨울식량으로 삼았다. 이런 문제로 매년 겨울마다 힘겨워하던 유럽 농민에게 감자는 또 한 번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감자를 가축의 먹이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감자는 저온에서 보존성이 뛰어나 겨울에도 얼마든지 식량으로 쓸 수 있었다. 아쉽게도 풀을 주식으로 하는 소는 감자를 먹지 않았지만 돼지는 잘 먹었다. 하지만 감자가 인간 식량으로도 이용됐기 때문에 여분의 보리와 호밀 등을 소에게 먹이로 줄 수 있었다. 감자 보급이후 유럽인들은 겨울 동안 신선한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섭취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감자가 들어온 후 다양한 고기 요리가 발달하면서 유럽은 채식에서 육식 문화 국가로 거듭났다.


유럽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 과정에서 경작지는 황폐해지고 빈곤과 가난은 극심해졌다. 더구나 한랭기후 탓에 매년 인간과 가축을 위한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감자는 밀이 자라지 못하는 한랭기후와 척박한 토지에서 잘 자랐다. 전쟁이 벌어지면 밀밭은 말발굽과 병사들에게 짓밟히고 불에 타 없어지지만 땅 속의 감자는 전쟁이 끝난 후 안전하게 수확할 수 있었다. 감자 재배로 사람들이 굶지않고 안정적으로 식량을 얻게 되자 유럽 각국은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인구 증가는 노동력 증가로 이어졌고 이는 이후의 산업혁명과 공업화의 뒷받침이 되어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었다. 


감자는 세상을 바꾸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해냈다.

지금 인류는 감자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없다. 감자는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는다. 으깨어 샐러드를 하고 수프에 넣거나 그라탱으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감자 녹말은 당면을 만들고 술 주정을 만들며 제약용 비타민 C 분말도 감자에서 얻는다. 무엇보다 서양인이 스테이크에 곁들여 먹는 최고의 채소류다. 감자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서양인에게서 감자를 빼앗는다면 식생활의 한 축이 무너져버릴 것이다. 이처럼 감자는 천대받던 작물에서 사람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작물로 재인식되면서 인류에게 커다란 혜택을 주었다.


참고)

1. 사피엔스의 식탁/ 문갑순 지음/ 21세기북스

2.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식물/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서수지 역/ 사람과 나무사이